5학년 2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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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하르방

이름 장민혁 등록일 17.05.18 조회수 15

돌하르방

툭 튀어나온 동그란 두 눈, 굳게 다문 입, 벙거지 같은 모자를 쓰고 있는 머리, 구부정한 자세에 한쪽 어깨는 치켜올리고 굳게 움켜쥔 두 손으로는 배를 감싸안고 있는 제주의 돌하르방. 구멍이 숭숭한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터라 생김새만큼이나 질감도 독특한 돌하르방은 제주도의 상징이자 간판 얼굴로 자리잡고 있다. ‘돌로 만든 할아버지’라는 뜻의 돌하르방은 오래전부터 아이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말이었는데 1971년 제주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면서부터 정식 명칭으로 굳어졌다. 이전에는 지역에 따라 이름이 달랐다. 제주시에서는 ‘우석목’, 성읍리에서는 ‘벅수머리’ ‘무석목’이라 했으며, 대정읍에서는 ‘무석목’이라 했다. 제주사람들이 잘 쓰는 말은 아니지만, 옛 기록에는 ‘옹중석’()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벅수머리는 흔히 육지에서 장승을 두고 벅수·벅시·법수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의 말로 보이지만, 우석목·무석목·옹중석은 무슨 뜻인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돌하르방을 육지 장승과 비교해보면, 장승의 경우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 손의 표현이 생략되게 마련인데 이에 반해 돌하르방은 왼손과 오른손의 위치가 일정치는 않으나 반드시 두 손으로 가슴이나 배를 감싸고 있다. 또한 돌하르방은 모두 수염이 없으며, 입을 다물고 있어 이가 보이지 않는다.

장승과 돌하르방은 생김새뿐만 아니라 기능도 약간 다르다. 장승이 신앙적 기능이 강한 데 비해 돌하르방은 그 기능이 미약하며, 오히려 성곽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제주도가 빠르게 도시화됨에 따라 돌하르방은 원래의 위치에서 심심치 않게 이동하였는데, 현재는 제주대학교, 제주시청, 제주 KBS방송국, 제주공항, 제주 민속자연사박물관, 목석원 등지에 흩어져 있다. 관덕정과 삼성혈에 있는 돌하르방도 본래 그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니다. 돌하르방은 제주목·정의현·대정현의 읍성 주위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고 주변 마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데, 이로 미루어 돌하르방이 주로 읍성 수호신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몸통에 정낭을 걸쳐놓았던 구멍이 있어 수문장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그렇다면 돌하르방이 만들어진 것은 언제일까? 효종 4년(1653) 이원진이 편찬한 『탐라지』에 “옹중석(돌하르방)은 제주읍의 성 동·서·남 삼문 밖에 있었고, 영조 30년(1754) 김몽규가 세웠으나, 삼문이 헐림으로 인하여 2기는 관덕정 앞에, 2기는 삼성사 입구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김몽규가 돌하르방을 새로 만들어 세웠는지 본래 있었던 것을 성문 앞으로 옮겨다 세운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 다만 돌하르방이 1754년 무렵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돌장승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나주 운흥사터 장승이 1719년, 남원 실상사 장승이 각각 1725년과 1731년에 만들어졌으니, 돌하르방이 있었던 1754년은 현존하는 돌장승 가운데 가장 뛰어난 명품들이 만들어진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돌하르방은 조선 후기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돌장승 문화의 영향을 받아 태어난 것으로 추정해볼 수도 있다. 한 예로, 돌장승이 가장 많은 지리산 자락의 남원 호기리 장승은 돌하르방과 매우 닮아 있다.

돌하르방이 어디서 왔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육지영향설말고도 남태평양에 널리 퍼진 거인숭배신앙(이스터 섬의 석상이 대표적이다)이 우리나라에 전파된 것으로 보는 남방기원설, 돌하르방이 훈촐로라 불리는 석인상과 닮은 것으로 보아 제주가 몽골(원)의 지배받을 때 몽골로부터 영향받은 것으로 추정하는 몽골기원설, 그외 제주자생설 등이 있다.

현재 돌하르방은 제주시에 21기, 정의와 대정에 각각 12기, 서울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 2기 등 모두 47기가 남아 있다. 원래 48기였는데 1기는 소실되었다.

제주시에는 제주대학교에 4기, 제주 KBS방송국에 2기, 제주시청에 2기, 삼성혈에 4기, 제주공항에 2기, 관덕정에 4기, 제주 민속자연사박물관에 2기, 목석원에 1기가 있는데, 조금씩 다른 모양새이다. 그러나 대체로 제주시의 돌하르방들은 다른 지역의 그것보다 몸집이 크고 근엄한 표정으로 권위를 앞세운 것이 특징이다. 제주도 기념품으로 만들어져 우리 눈에 익은 돌하르방은 이곳 제주시의 돌하르방을 모델로 한 것이다.

제주대학교 박물관 입구 동쪽에 서 있는 것과 관덕정 뒤뜰 남쪽에 서 있는 것은 여느 돌하르방과 달리 가슴이 젖무덤처럼 불룩하다. 그런데도 ‘돌할망’이라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 불룩한 가슴을 용맹스러운 남자의 발달된 가슴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또한 제주대학교 박물관 입구 동쪽의 것은 모자 위쪽에 도드라지게 조각된 테두리가 눈에 띈다.

제주시의 돌하르방

제주시의 돌하르방제주대학교 박물관 입구 동쪽에 서 있는 돌하르방이다. 여느 돌하르방과 달리 가슴이 불룩하다.

대정의 돌하르방

대정의 돌하르방서문쪽 담장 아래에 있는 돌하르방이다. 제주시의 돌하르방에 비해 작고 조각도 뒤떨어진 편이나 대신 조신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정의의 돌하르방

정의의 돌하르방서문에 있는 돌하르방이다. 정의의 돌하르방은 대정의 돌하르방과 비슷하나 전체적인 느낌은 퉁명스럽고 무뚝뚝하다.

대정의 돌하르방은 현재 추사적거지 앞에 2기, 동문터에 1기, 서문터에 1기, 서문쪽 담장 아래 1기, 남문터에 2기, 보성초등학교에 3기, 보성리사무소 앞에 2기가 있다. 대정의 돌하르방은 다른 지역 것보다 키가 작고 온순한 인상이다. 눈은 쌍안경을 낀 듯 튀어나오거나 윤곽만 새겨져 있는데, 어떤 경우든 눈동자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코도 갸름하여 제주시 돌하르방들의 뭉툭한 주먹코와는 사뭇 다르다.

보성초등학교 앞과 추사적거지 앞에 있는 돌하르방은 다른 것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목도리 같은 것을 두르고 있다. 추사적거지 돌하르방은 목도리 양끝을 가지런히 내리고 있는 반면, 보성초등학교 돌하르방은 그냥 두툼한 목걸이처럼 목에 둘렀으며 아기단풍잎 같은 손가락을 귀엽게 펴고 있다. 마을회관 앞에 있는 돌하르방도 작은 손가락을 펴고 있어 천진스럽게 보인다.

정의의 돌하르방은 성읍민속마을 동·서·남문에 각각 4기씩 있는데, 동문과 남문의 것은 철책으로 보호하고 있어 답답해 보인다. 정의의 돌하르방은 대정의 것들보다 크고 제주시 것들보다 작은데 둥글넓적하고 단순하다. 갸름하게 내리뻗은 코는 대정 것과 비슷하지만, 게슴츠레한 눈과 선 하나로 그어져 있는 입 모양은 그저 덤덤하거나 무뚝뚝해 보일 뿐이다. 귀는 작으며 손은 윤곽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고, 옷의 형체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볼 때 대정과 정의에 있는 돌하르방들은 평균 신장이 각각 136.2㎝, 141.4㎝이다. 제주시의 돌하르방들이 181.6㎝인 데 견준다면 꽤 작은 셈이다. 또한 대정과 정의의 돌하르방들은 얼굴에 비해 몸집이 작아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지만 조신하고 편안한 인상이어서 제주시 돌하르방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인간미와 소박함이 풍긴다. 제주시 돌하르방이 지배층의 권위를 표상한다면, 대정과 정의의 돌하르방은 제주 옛사람의 순박한 모습 그대로라고 할까.

이제 돌하르방은 그 옛날 읍성을 지키던 수호신에서 명실공히 제주도를 상징하는 세계적인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문화적 원류나 전파과정, 수효, 정확한 명칭, 본래 위치, 그리고 기능 등이 아직 명쾌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여러 각도에서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돌하르방 (답사여행의 길잡이 11 - 한려수도와 제주도, 초판 1998., 14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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